01 2018. 3. 12. 07:04
*
알고 보니 오늘은 여름 방학이 끝난 지 고작 삼 일 지난 2학기였다. 지난 밤 연락처를 뒤져 보니 친구로 추정되는 애 몇 명과 온갖 하트로 도배된 이름. 보나마나 남주가 아닐까 싶었지만 문자 내역까진 차마 못 볼 거 같아서 그냥 안 보기로 했고 다른 친구와의 문자 내역에서 '아시발내일개학' 이라는 문자 내용을 발견했고 고작 엊그제 대화였다.

양아치 악녀답게 교복도 꽉 맞게 입어서 조금 답답했다. 여고에다 고3이었던 난 체육복이 생활화 된 지 오래인지라 당장 벗고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길이도 너무 짧아서 선도부의 눈치를 조금 봤지만 신경도 안 쓰는 걸 보아하니 이 학교는 그렇게 훌륭한 명문고는 아닐 거 같았다. 애초에 남주가 다니는 학교니까 뭐...

등교길을 클리어 한 지 얼마나 됐다고 곧바로 문제가 생겼네 내가 몇 반인지 모르는데 어쩌지? 우선 1학년 교실은 어찌저찌 찾았는데 아무리 머리 꽁꽁 싸매고 고민해봐도 내가 몇 반인지 알 리가 만무했다. 어떡하냐 내가 아는 거라곤 남주랑 같은 반이라는 사실 하나뿐


"야~ 김태~~ 자칭 네 여친 오셨다~!"
"좆같게 굴래? 한 번만 더 지껄여 봐."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남자 무리가 낄낄대며 오고 있었다. 그나저나 김태형이라고? 이 소설 속 남주잖아.놀란 건 둘째치고 저 무리에서 김태형이 누군지 알아채기도 전에 날 보고 노골적으로 표정이 굳어지는 남자애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나 가슴팍을 보니 '김태형' 이라는 명찰이 반듯하게 달려있었고 절대 마주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당황한 표정을 지어버렸다.


"이번엔 또 무슨 컨셉질이냐?"


잘생기긴 오지게 잘생겼네. 화난 얼굴인데 잘생겨서 놀랐다. 날 싫어할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극혐할 줄도 몰랐고.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땅만 보고 있었는데 바람 빠지는 웃음 소리가 났다.


"진짜 지긋지긋하니까 그만 좀 따라다녀."


따라다니는 건 나도 싫은데 뭔가 오해를 단단히 산 거 같았다. 솔직히 나 오늘은 아무것도 안 했는데 따지고 보면 시비도 쟤네가 먼저 털었다. 이쯤 되면 정채이는 얼마나 김태형을 따라다녔길래 아무 말을 안 해도 혐오하는 지경에 다다랐나


"꺼져."


와이씨 나쁜 놈. 조금 상처 받았다. 내 몸도 아닌데 억울하기까지 하다. 그치만 김태형한테 구구절절 설명해봤자 오히려 더 또라이로 볼 거고, 아니 그나저나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게 온 몸으로 느껴지는데 몇 개월간 따라다닌 정채이는 또 뭐람. 교실로 들어가는 김태형을 황급히 붙잡고 그래도 이 말은 꼭 해야겠다 싶었다.


"나 너 이제 안 좋아해."

"...?"

"진심이야. 안 따라다녀."


얘기를 들은 김태형은 무언가 화난 표정으로 계속 미간을 찌푸리며 바라봤고 되려 옆에 있던 친구들이 푸하하하 비웃으면서 조롱했다. 네가 김태형을 안 따라다닌다고? 차라리 하늘이 무너진다고 해라! ㅋㅋㅋ 하곤 반으로 다시 들어가버렸지만. 솔직히 믿든 안 믿든 자기들 자유긴 하지만 너무 가볍게 무시 당한 기분이라 조금 좆같았다. 근데 나 얘랑 같은 반이라 다시 저기 들어가야 하네 조팔.

*

지각은 면하려고 아침 일찍 준비했는데 교실 문 앞에서 김태형네 무리랑 실랑이를 하는 사이 또 시간이 흘렀는지 교실 안은 수업 하기 직전 조용한 분위기였고 다들 앉아있어서 다행히 빈 자리를 찾아 앉았다. 김태형은 남주답게(?) 3분단 끝자리를 홀로 사용했고 내 자리는 1분단 뒤에서 두 번째였으며 짝꿍은 자고 있었다.


"오늘은 필기할 게 많으니 놓치지 말도록."


사회 선생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학생들이 누워있거나 말거나 자기 필기에 몰두하기 여념이 없었다. 가만히 있기는 뻘쭘하니 필기라도 대충 따라 써야지 하고 가방을 뒤졌더니 구겨진 가정통신문이랑 네임펜 한 자루밖에 없었다. 필통도 없을 줄이야... 망할


"저기..."
"?..."
"혹시 연필이나 볼펜 있으면 아무거나 빌려줄 수 있어?"


아무리 그래도 네임펜으로 필기하는 건 오바니까 누워있는 짝꿍한테 말을 걸었더니 신선한 충격이라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 그래.. 여기!"
"아 고마워 저..."


떨떠름한 표정의 짝꿍을 애써 무시하곤 0.1초만에 명찰을 잽싸게 보곤 말했다.


"...정윤아. 수업 끝나고 매점 가서 바로 사올게."
"아냐 너 가져도 돼."


별로 안 친한 사람을 대하는 듯한 어색한 표정으로 다시 누운 정윤이를 바라보는데 이게 누굴 일진으로 보나. 하고 욱했다가 여기선 양아치네 싶어서 생각을 고쳐 먹었다.


"아니.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돌려줄 거야!"
"으응? 그래...;"


살짝 당황해하는 정윤이를 모른 체 하고 가방 속에서 막 눌린 노트를 피는데 노트는 역시 너무나도 깨끗했고 가끔 빙고나 쪽지를 쓴 흔적 같은 것들만 있었다. 어휴 얘 진짜 심각하긴 하네. 1학기 성적은 보나마나 망했겠지만 지금이라도 내신 잡으면 괜찮겠지라는 현실적인 생각이나 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대충 살았던 고3의 인생을 깨끗하겐 아니지만 털어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엥 너 공부해?"


그렇게 쉬는 시간이 온 줄도 모르고 고민하며 플랜을 짜고 있는데 웬 처음 보는 애가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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