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2018. 3. 12. 08:26
"엥 너 공부해?"

그렇게 쉬는 시간이 온 줄도 모르고 고민하며 플랜을 짜고 있는데 웬 처음 보는 애가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

여기서 문제는 얘는 누군데 나한테 이렇게 친한 척을 하는 것이며, 학교에서 최대한 조용하게 살고 싶은데 혹시 김태형이랑 같이 노는 무리면 어떡하지 싶으며, 결정적으로 명찰이 없다...!


"어? 아니 그냥 뭐..."


대충 할 말 없게 만들면 가겠지 싶어서 대충 얼버무렸는데 이젠 아예 대놓고 비어있는 앞자리 의자에 앉아서 말을 건넨다.


"김태형 이상형이 공부 잘하는 여자래?"

"뭐?? 아냐 그런 거. 나 이제 걔 안 좋아해."


황당하다는 듯이 차라리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라 하면서 피식 웃었다. 아니 여기 있는 애들은 내가 김태형 안 좋아하는 게 그렇게 큰일날 일인가? 너무 황당해서 할 말을 잃었다.


"진짜야. 맘 접었어."

"너 바로 그제까지만 해도 좋다고 졸졸 따라다녔던 애가?"


아 ㅎㅎ 이러니까 못 믿는 거구나. 그제는 정채이고 오늘은 김여주인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근데 지금은 진짜 안 좋아하는 게 사실인데 해명할 것도 없다.


"그냥 소설 같은 거 보면 하루 아침에 사랑하고 마음 접고 그러잖아. 그런 거지 뭐."

"오 진짠가 보네? 근데 너 걔 왜 좋아했냐?"

"음.. 그냥 웃는 게 예뻐서?"

"걔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의외로 남자애는 별 추궁을 안 하고 그러려니 넘어갔다. 그러고보니 진짜 정채이라는 인물이 어떻게 남주를 좋아하게 됐는지는 아무도 원하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을 거다. 잘생겨서 따라다닌다는 것도 그저 추측일 뿐이고 웃는 게 예쁘단 것도 대충 지어낸 말이지 진짜 예쁠지 아닐지는 모를 일이다. 참나 생각해보니 어이가 없네 악녀 캐릭터는 뭐가 이렇게 부실하냐.


"남준아! 선생님이 부르셔!"

"잠시만 곧 갈게. 그럼 너 조용히 학교만 다니게?"


정채이가 얼마나 시끌벅적하게 김태형을 쫓아다녔는지 상상만 해도 참 버겁다. 아 그리고 대화하는 애 이름은 남준이었다. 성은 몰라도 대충 이름만 부르면 되겠지 뭐.


"응.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 가야지. 너 선생님이 부른다며 얼른 가 봐."

"... 신기할 따름이네 그럼 이따 보자."


하긴 누가 봐도 신기할 노릇이었다. 반년 내내 김태형 좋다고 졸졸 따라다니고 (보통 따라다녔나 악질적으로 따라다녔으니 저렇게 싫어했겠지) 귀찮게 굴었던 애가 갑자기 하루 아침에 안 좋아한다고 하는 것도 모자라 공부 얘기나 지껄이고 있으니... 그나마 착해보이는 친구라 다행이지 김태형 무리라거나 그런 부류였으면 분명 이해 못하고 놀려댔을 게 뻔하다. 맞다. 정윤이 펜 사주러 매점 가야겠네. 근데 매점은 또 어디냐

일부러 반 친구가 아닌 안 친해보이는 애한테 겨우 물어서 매점에 갔더니 김태형 무리가 있었다. 야 정채이다. 아침까지만 해도 안 좋아한다고 뭐라고 하더니 또 따라왔네. 그리고 여전히 말 없이 미간을 좁히고 있는 김태형도 보였다.


"아줌마! 여기 필기하는 펜 어딨어요?"


억울하지만 억울하다고 말 못하는 이 심정을 누가 알까
나 들으라고 크게 떠드는 거 뻔히 들리지만 모르는 척 필요한 것만 재빨리 요구했다. 괜히 여기서 오래 있다간 엮이기만 할 뿐 좋은 일 하나 없을 테니까.

*

"정윤아 펜 잘 썼어. 그리고 새 거로 하나 샀으니까 넌 새 거 써!"
"그래... 근데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고마워."


얘는 뭐냐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정윤이를 애써 무시하며 수업에 집중하려다가 다시 정윤이에게 물었다.


"근데 남준이 성이 뭔지 알아?"
"설마 우리반 반장 말하는 거야?..."
"아니 친구 사이에 농담도 못 하냐~ 김씨자나 김씨~!"


의심이 더 짙은 표정으로 날 잠깐 보더니 김씨가 맞긴 한지 얘기를 끝마치고 책상에 편하게 엎드린 정윤이를 보았다. 흠 뭔가 유식해 보이던데 반장까지 맡고 있었네 그리고 남준이 성이 흔해서 참 다행이다 싶었다. 3교시를 무사히 끝마치고 남준이 자리로 가서 물어봤다.


"남준아 너 공부 잘 해?"


오히려 나보다 내 주위가 더 웅성웅성거리는 걸 보니 내가 또 당연한 말을 했거나 아예 반대로 말을 했나 보다. 근데 반장까지 도맡은 애가 못 할 리는 없겠고


"하핫. 농담이야."
"오늘따라 왜 그래. 너 정채이 아니지."


웃으면서 하는 말에 뼈가 가득해서 아플 지경이었다. 괜히 찔려서 더 히히 웃었다.


"그게 아니라 나 오늘부터 공부할 건데 나 좀 알려주라."
"그럼 너 야자도 해야 하는데 할 수 있겠어?"


야자. 나를 3년간 괴롭혔던 야간 자율 학습이이었지만 이렇게라도 해서 김태형 신경 안 쓰고 공부에 몰두하는 사람으로 보인다면 기꺼이 하겠다고 해야지 뭘 어떡해. 정채이 인생 너무 기구해서 눈물이 날 거 같네

*

그나마 자유로운 학교라 야자 때 자리를 바꿀 수 있음에 감사했다. 덕분에 남준이가 내 옆자리로 옮겨서 (꽤나 공부를 할 거 같았던 정윤이는 알고보니 게임 폐인이었다) 개인 강의를 해주고 있었다. 당장 문제집도 없는 나여서 아쉬운대로 남준이가 1학기 때 사용했던 문제집을 빌려 쓰는데 이렇게 깨끗할 수가!


[ 남준아 너 공부 잘 하는데 문제집이 왜 이렇게 깨끗하니 ]

[ 나 문제집에는 답 안 쓰고 따로 노트에 필기해서 그래. ]


보통 공부를 잘 하는 게 아니였구나

.
.
[ 너 꽤 잘 하는데? 내가 본 모습 중에 제일 기특하네]


공부 잘 하는 애가 해주는 칭찬은 생각보다 많이 부끄러웠다. 1학기 거 겨우 풀고 있는 나한테 격려해주는 남준이는 생각보다 더 착했고 다정했다. 괜히 멋쩍어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

김태형이랑 눈이 잠깐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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